병 속에 든 편지가 이어준 55년 된 펜팔 인연, 소설같은 실화의 주인공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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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 3. 14. 12:00
'펜팔'의 시대를 아시나요? 이메일과 스마트폰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 바다 건너 이름 모를 친구와 펜팔을 맺고 국제 우편을 보내는 것이 붐이었는데, 이제는 추억 뒤켠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펜팔이 전해준 오랜 추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펜팔'이라는 단어에 익숙한 여러분이라면 아련한 옛날 기억을 꺼내보실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최근 CNN에서는 무려 55년간 펜팔로 인연을 맺어온 두 사람의 이야기를 조명했습니다. '병 속에 든 편지'라는 영화에서만 있을 법한 이야기가 실제로 존재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1967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15살난 로빈저 비버는 서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에 있는 해변을 걷고 있었습니다. 외교관이었던 비버의 아버지가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기 위해 몬로비아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해변은 평상시 자주 산책하던 곳이었죠.
파도가 유난히 거세게 치던 날 바다에서 떠밀려온 해초와 나뭇조각이 해변에 뒹굴었습니다. 멍하니 걷던 비버는 늦은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뭔가를 발견했는데요. "큰 바다가 무엇을 가져올까 항상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던 사람이다"라며 CNN 과의 인터뷰를 통해 비버는 당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위스키 병이 있었고, 안에 말아 넣은 뭔가가 들어있었습니다. 이를 심상치 않게 여긴 비버는 병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는데요. 어머니에게 병을 보여주고는 내용물을 함께 확인했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안에는 편지가 들어있었는데요. "나는 중앙아프리카의 적도 근처를 항해하는 상선에서 편지가 담긴 병을 바다에 던진다. 내 이름은 고스타 마텐손, 나는 스웨덴 상인이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1965년에 적힌 이 편지에는 보낸 이의 스웨덴 집 주소가 적혀 있었죠. 비버는 스스로를 소개하며 열정적으로 답장을 썼습니다. 비버는 자신이 영국계 미국인 아버지와 이탈리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마텐손에게 어떻게 그가 편지가 담긴 병을 발견했는지에 대해서도 적었습니다.
바다 건너 비버의 답장을 받은 마텐손은 편지가 미지의 세계를 지나 수신자를 찾은 것에 놀라워했는데 자신은 20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15살인 비버에게 어울리지 않는 펜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이 펜팔을 14살 된 자신의 처제에게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처제의 이름은 쿠파리넨, 핀란드에 살고 있었는데요. 형부가 보낸 병에 담긴 편지에 누군가가 답장을 썼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진 쿠파리넨은 편지 릴레이를 이어가보기로 합니다.
영어가 서툴렀던 쿠파리넨은 독일어로 핀란드에서의 자신의 삶에 대해 소개했죠. 머나먼 곳을 지나 다시 답장이 올지 노심초사하며 기다렸다고 합니다. 비버는 편지를 받고 핀란드에 있는 미지의 소녀와 글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설렜습니다.
그로부터 55년 후 둘은 여전히 펜팔로서 연락을 이어갔고 서로가 성장하고, 나이 들어가는 모든 과정을 멀리서 지켜봤습니다.
아버지가 외교관이었던 비버는 평생을 세계를 떠돌면서 살았는데요. 라이베리아와 워싱턴 DC를 거쳐 아버지가 베트남전 때문에 베트남에 가있는 동안에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타이베이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전이 격화되었던 당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얼굴도 보지 못한 친구에게 토로하기도 했죠.
비록 만나보진 않았어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비버는 베트남전에 징집되지 않았고, 둘은 연락을 지속했습니다. 둘은 록 뮤직을 사랑했고 롤링 스톤, 마마스&파파스의 팬이었죠. 세월이 흘러 둘은 때때로 전화를 하는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수화기를 잡고 전화 너머에 흘려 퍼지는 노래를 들으며 함께 춤을 추기도 했죠.
비버가 이사를 다니는 동안에도 편지가 몇 차례 반송되긴 했지만, 희한하게도 편지는 주인을 잘 찾아갔습니다. 항상 창의적이고 예쁜 방식으로 답장을 쓰기를 원했던 쿠파리넨은 자신이 좋아한 잡지를 찢어 편지 봉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편지를 받으면서 비버는 분명 편지를 쓴 소녀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죠.
병 속 편지의 주인공 마텐손도 이들 둘을 이어준 만남에 대해 뿌듯해했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늘 가까이한다는 생각이 들어 비버도 친구들에게 쿠파리넨을 절친으로 소개했죠.
쿠파리넨이 던진 철학적인 질문은 비버를 사색에 잠기게 했습니다.
"10년 후에 넌 어디에 있을 것 같아?", "너 아직 결혼 안 했니?", "넌 지금 뭘 하고 있니?", "아직도 방랑 중이니?", "우리 오래 편지 썼는데, 핀란드에 날 만나러 올 거니?"라는 질문들을 했죠.
시간은 흘러 인터넷의 시대가 왔습니다. '달팽이 편지'의 시대는 지고 이메일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2003년에 마침내 이들의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편지를 쓴 이후 처음 만난 것이죠. 쿠파리넨을 만나려고 비버는 비행기를 타고 헬싱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시간을 초월해 만난 이들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악수만 했습니다. 그리고 쿠파리넨의 집에 도착했죠.
집에는 쿠파리넨의 딸과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펜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던지라, 쿠파리넨의 남편은 비버를 만나자마자 오래 알던 친구처럼 금방 익숙해졌습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서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죠.
비버는 작별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스웨터를 깜빡하고 두고 온 걸 알게 되었습니다. 쿠파리넨은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 입으면 되니까, 잘 보관하고 있겠다고 했죠.
이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났습니다. 비버는 쿠파리넨을 2번째로 방문했죠. 이미 비버도 누군가의 남편, 그리고 쌍둥이 아들을 가진 아빠가 되었습니다. 비버는 쿠파리넨과 버섯과 딸기도 따고 한참 산책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핀란드 맥주를 먹으며 각자 가족을 꾸리고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처음 펜팔로 인연을 맺은지 55년이 지났지만, 둘은 여전히 소통하고 있습니다. 달팽이 편지에서 현재에는 화상 전화로 단지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죠. 모든 것이 빠르고 편한 요즘의 소통 방식으로 인해 뭔가를 잃은 것 같기도, 얻은 것 같기도 하다고 둘은 말합니다.
이메일과 화상전화는 참 편하지만, 아름다운 봉투에 담긴 편지를 받는 것만큼이나 설레는 감정은 없다고 하네요. 팬데믹으로 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독일에 사는 비버는 마침내 오래전에 받은 해묵은 편지 더미를 다시 꺼내보게 되었습니다. 추억이 보내준 보물이라며 소년 소녀가 검정 잉크로 연락을 전하던 과거를 회상했죠.
비버가 55년간 펜팔 친구와 소통하면서 얻은 결론은 바로 이렇습니다.
"매 순간, 살아있음을 느껴라. 친구, 가족에게 사랑을 전해라"
오늘 무심코 시작한 작은 소통이 당신의 일상, 어쩌면 인생을 바꿀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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